우리는 헌법적 가치와 역사 정의에 역행하는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에 심각한 우려를 표방하며, 국민적 기대에 반하는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즉각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전시 통제·동원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8년 <국가총동원법>, 1944년 <국민징용령> 등을 통해 조선인에 대한 징용과 강제동원을 실시하였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는 대략 7백8십만 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이 약속한 급여를 받지 못한 채 탄광, 항만, 비행장, 발전소,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해방 이후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이 외면했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은 1990년대 제기된 피해 배상 소송으로 본격화되었다. 비록 일본 법원에서의 소송은 패소하였지만, 한국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피해 배상 소송은 오랜 법정 공방 끝에 2018년 승소하였다. 당시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 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일본 기업의 배상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확정하였다. 판결에 불복한 일본 기업은 배상 이행을 거부하였고, 일본 정부 역시 경제 보복 조치로 대응하면서 한일관계는 경색되었다. 출범 직후부터 한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표명했던 윤석열 정부는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소위 ‘제3자 변제 방안’을 제안하였으며, 일본 수상과의 회담을 통해 이를 공식화하였다.
윤석열 정부의 이번 ‘제3자 변제 방안’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 가해 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이 피해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으로, 참으로 굴욕적이고 참담한 외교실패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책무를 저버리고 국민을 기만하는 반헌법적이며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첫째, 윤석열 정부의 배상안은 피해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일방적인 조치로서 피해자 중심의 문제 해결을 원칙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에 정면으로 배치된 상식 밖의 결정이다. 또한 국민 일반의 정서에 반해 가해자인 일본 기업에게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대법윈의 사법적 결정을 스스로 부인한 반헌법적 행위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우리나라 헌법은 부당한 식민통치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회복과 치유에 앞장서야 할 중대한 책무와 당위성을 포괄하고 있다. 현 정부는 이러한 헌법적 가치에 입각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고 국민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야 함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존엄과 헌법적 가치를 내팽게친 채 오로지 일본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대변한 윤석열 정권은 국민적 저항과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윤석열 정부는 한일관계 파탄의 책임이 일본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채, 국익을 명분으로 피해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2차 가해를 중단해야 한다. 잘못된 과거사의 반성 문제를 경제보복 조치로 맞서며 한일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간 것은 일본 정부이다. 양국의 과거사 문제는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협의해야 할 사안임에도 일방적인 경제 보복 조치로 일관한 일본 정부에 대해 현 정부가 일언반구도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이 나라 국민인 피해자들의 존엄과 정당한 법적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들을 외교적 흥정의 대가로 해서 얻는 국익이 무엇인지,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 누가 윤석열 정부에게 이와 같은 권한을 주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어디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사람인가, 조선사람인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양금덕 할머니의 피맺힌 외침은 피해자들만의 절규가 아니라 온 국민의 준엄한 물음이다. 윤석열 정권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이번 ‘강제동원 배상안’ 사태로 나타난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 신냉전체제의 강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일관계는 불행한 과거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아프지만 성찰하고 반성하며 완전한 치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미래 발전적 한일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더 큰 상호신뢰와 협력의 토양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실한 사죄는 더 큰 울림과 반향 속에서 일본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할 것이다. 또한 이번 강제동원 배상안 사태의 이면에 놓여 있는 한·일 군사협력 강화는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과 대립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 동아시아 주변국과의 호혜적인 관계 발전에 역행하는 신냉전질서의 구축은 한반도의 분단질서를 극복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현 정부가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신냉전체제에 가담하기보다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한 외교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한다.
강제동원 배상방식은 대법원의 판결에 입각하여 피해자에게 정당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사죄 없이 동냥처럼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고 토로하신 피해 당사자의 울분은 35년 굴욕의 식민통치를 뛰어넘어 자주독립국가의 국민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강제동원 배상안’을 즉각 철회하고 새로운 해결방식을 국민과 함께 모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1980년 5·18 항쟁의 발원지인 우리 전남대학교의 교수들은 불의에 맞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했던 광주시민의 주먹밥과 연대의 정신을 기억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함께 할 것이다.
2023년 3월 30일
윤석열 정부 ‘일제 강제동원 배상안’에 반대하는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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